웹툰 영화 음악을 끊어보니… ‘대화’가 늘어났다

지난 글에선 소오향(消五香)을 좀 더 빡세게 해보겠다 다짐한 바 있다.

이제 20일 정도를 실천해보니, 머리가 맑아졌다느니, 여유가 생겼다느니 등등은 자칫 정신승리만 되고, 그냥 ‘그렇게 느꼈다’ 뿐일 수 있으니 논외로 하더라도 눈으로, 물리적으로 확실히 볼 수 있는 한가지가 있다.

바로 타인과의 대화 시간 및 그에 쏟는 정성이 이전에 비해 엄청나게 늘어났다는 점.

이전까진 누군가와의 카톡 대화, 카페 등 SNS를 통한 타인과의 소통 등을 이거 말고도 할 게 많아 바쁜데 마지못해 추가로 처리해야 할 ‘숙제’,  또는 ‘안 할 수 있다면 안 하고 싶은’ 무엇처럼 느껴지는 때가 많았다.

누군가로부터 온 카톡 메시지 알림 표시가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했다.

그래서 용건이 있을 때만 연락하고, 정말 딱 용건만 주고받고 끝내는 일이 잦았다.

그런 건 얼른 후다닥 대충 치우고,  원래 나 혼자의 생활로 돌아가고픈 몸부림이랄까.

조금 과장하자면 체감이 그랬다. 이건 어떤 핑계를 대도 부인할 수 없다. 스스로를 속일 순 없으니까.

그런데 일하고 공부하고 남는 시간에 킬링타임의 빈도가 줄어드고, 자연스럽게 금촉(禁觸)이 이루어지니 새롭게 집중할 대상이 없나, 저절로 찾게 된다. 계속 아무 것도 안 하며 멍 때리고 있을 순 없으니깐.

내 경우는 그 새 집중의 대상을 인간관계 및 대화로 삼아 몰빵(?)했고, 조금 시간이 지나고나니 어느샌가 타인과의 대화 소통이 내 일상에서 메인이 됐다.

이전과 메인과 서브가 바뀌어 주(主)가 대화/ 관계/ 소통이 되고, 평소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도 그것과 관련된 내용이 거의 전부가 됐다.

당구나 바둑을 배우는 초기엔 누우면 천장에 당구알이 굴러가고, 바둑판이 그려진다 했던가.

그처럼 머릿속에 사람들이 떠오르며

– 그분에게 어떤 말을 해주면 좋아할까
– 이런 걸 알려주면 도움이 될까
– 이분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고, 어떤 감정 기분 상태일까
– 이분은 안보인지 좀 됐는데, 최근 무슨 일이 있었을까, 내가 모르는 일이라도 생긴 걸까
– 저분에겐 차라리 짧게만 말 걸며 치고 빠지는 게 좋을까, 길게 다독여주는 게 나을까
– 저분한테 지금 말 걸어도 좋은 타이밍인가, 아니면 참고 기다려야 하는 때인가

등등이 바둑알처럼 
쉴새없이 굴러다니기 시작했다. 

그와 함께 자연히 

– 이 분은 표현이 좀 서툴러서, 의도한대로 전달도 잘 안되고, 듣는 사람은 어이 없어 할 수 있겠구나
– 너무 잘 하려 하고 상대를 의식해서, 오히려 원래 본인 장점을 다 못 살리고 움츠리고 있구나
– 생각은 많아 보이는데 막상 말 하는 건 적은 걸 보니, 일단은 내가 리드해주되 언젠간 듣는 위주로도 해봐야겠다
– 지금 이분에겐 복잡한 말보단 칭찬 한마디가 백배 낫겠다, 괜히 오바하지 말자

등등처럼 개인별 성향 분석과 그에 따른 가설, 그 가설의 확인 및 수정, 다시 분석 등도 마치 게임 퀘스트를 깨듯 하나하나씩 건드려보게 됐다.

그리고 그 가설을 그대로 적용해, 나 스스로는 그동안 어땠고, 사람들 눈엔 어떻게 비추어질지 돌아보았다.

물론 그러면서 때론 헛다리도 짚고, 생각한대로 일이 안 흘러가 당황하기도 하지만 그래봤자 그게 뭐 엄청난 실수나 돌이킬 수 없는 패착 같은 것도 아니었다.

고치면 그만인 것들이다. 애초에 첫판부터 끝판까지 한번도 안 죽고 깰 수 있는 게임이면, 시시해서 누가 그걸 하려들까.

그러면서 간단한 질문 하나에 1시간을 넘도록 혼자 뭘 열나게 적어 답을 보내기도 하고, 단어 하나를 놓고 이리 썼다 저리 썼다 가장 적절한 표현을 고민하기도 하고,

이왕이면 나도, 상대로 기분 좋고 다시 보고픈 카톡창을 만들고 싶어 미숙하나마, 조금이라도 더 달달한 멘트와 들으면 행복해질듯한 말을 살짝 섞어 뿌려주기도 했다.

내게 있어 이 모든 건  매일의 웨이트 트레이닝처럼  하나의 ‘훈련’이기도 했다.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.

“아, 나는 인간관계를 ‘못’ 했던 게 아니라, 아예 ‘안’ 했던 거였구나!”

이처럼 대화, 관계, 소통의 부분이 일상의 메인이 되자
좀 더 잘하고픈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.

그러자 어쩔 수 없이, 스승이 내게,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 실제로 어떻게 말하고 행동했는지를 떠올려보고, 도저히 기억이 안 나면 찾아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.

그 스승의 언행과 비슷한 것을 상대에게 건넬 때, 대체로 좋은 반응이 돌아오는 걸 몇번이고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.

반대로 삘 좀 받았다고 스승 또는 상명학과 무관한, 
철저한 내 개인의 스타일대로 말했을 땐 불행히도 대부분 결과가 좋지 않았다.

상명학을 떠난 인간 김진우 그 자체는 아직도 참 가성비 망이었다. 요새 말론 정말 ‘ㅆ하타ㅊ’. “아니 대체 그딴 말을 내가 왜 했지?”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온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.

그래서 자연히,

– 교전님이라면 이 분에게, 이 상황에서 어떻게 말해줬을까?
– 교전님이라면 이 정도에서 멈췄을까, 더 이어갔을까?
– 교전님은 이때 대놓고 확 표현했을까, 아니면 은근히 돌려 전해줬을까?

등을 생각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게 된다.

그리 하면  ‘스승을 카피하는 게 너무 티 나지 않을까’도 처음엔 걱정했지만, 내 고유의 스타일은 항상 입고 있는 옷과 같아, 안 들키려 해도 어디서든 갑툭튀해 뚝뚝 묻어나는 것이기에

오히려 스승을 완벽하게 똑같이 따라하려 발악을 해야나 그나마 비슷한 느낌 정도라도 된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.

그게 아니라면, ‘이쁘다’, ‘좋아한다’. ‘사랑스럽다’, ‘보고 싶다’, ‘매력적이다’ 같은 말을 일상 대화에서 아무렇지 않게 쓰게 되는 데만 족히 10년은 더 걸리지 않았을까?

쪽팔린다, 민망하다, 작업 거는 거 같다, 굳이 내가 왜 그래야 하냐 등등 별의별 어처구니 핑계란 핑계는 죄다 끌어와 갖다 붙이면서 말이다.

이제사 대화의 즐거움, 마치 게임과도 같은 재미를 
조금씩 맛보고 있지만, 아직 갈 길이 멀다.

비록 눈은 저 위 스승의 경지, 몇마디 대화만으로 마음이 녹아내리고, 흥분되고 설레게 하는  마법과도 같은 신비를 향해 있지만

그건 나중 언젠가의 목표일 뿐,
현실은 갓 걸음마를 뗀 아기 수준이다.

최근 훈련목표 중 하나인 <달콤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기>만 해도 괜히 선넘거나 오해살까 주저하고, 달달 떠는 때가 부지기수다.

어력(語力)에서 배운 테크닉들도 미리 의식해야나 겨우겨우 써먹곤 한다.

그래도 이처럼 관심 있고 호감 가는 특정 소수를 향한 좁은 시도가 아닌, 그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만나면 행복 한스푼씩은 떠먹여줄 수 있는 내 모습이 익숙해질 때,

정말 사랑하고픈 사람에겐 스푼이 아닌, 드럼통째로 냅다 들이부으며 이게 진짜 사랑이라 웃으며 말해줄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.

도로 다시 돌아가지만 않길 바랄 뿐이다. 최근에 아카데미상을 탔다길래 영화 <기생충>을 결제해서 보니, 너무 재밌었다. 그리고 그 순간, 대화와 인간관계가 다시 ‘숙제’처럼 느껴지려는 것에 화들짝 놀라버렸다.

아무래도 앞으로도 당분간, 
이 소오향은 꾸준히 함께 해야 할 모양이다.

Published by SanMyu Author 청교학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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